역사

동양이 서양을 정복하지 못하고 왜 서양이 동양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吾喪我 2010. 8. 25. 23:39

동양이 서양을 정복하지 못하고 왜 서양이 동양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제가 머리가 커지면서 갖던 의문점이었습니다.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우수하다는 인종주의적 생각은 일고의 고려대상도 안되는 편견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양이 서양을 정복하려 할 때도 있었습니다.

8세기 이슬람이 스페인을 식민지로 만들기도 했고(이슬람이 마음 먹었으면 유럽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성을 못느꼈죠)

13세기 몽골의 바투의 원정군이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까지 박살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오고타이가 죽어서 칸의 계승문제 때문에 바투가 회군해서 유럽은 운좋게 살아남게 됩니다.


중국은 16세기까지는 서양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였고 문명도 발달하였습니다.

또 서세동점의 수단이 되었던 세계 3대발명품인 종이,나침반,화약을 발명한 곳은 서양이 아니고 동양입니다.

그런데 동양은 발전시키지 못했고 서양은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동양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가능하였을까요? 제 나름대로 내린 원인은 3가지입니다.


첫째, 서양은 부족하였고 동양(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중국)은 풍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시대때부터 서양은 동양에서 향신료,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수입되었습니다.

물론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슬람 상인들은 향신료를 인도에서 수입해서 30배로 비싸게 팔아먹었습니다. 


반면 동양 특히 중국은 부족한 것이 없었고 그래서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건륭제때 영국에서 무역하자고 사절단을 보내도 필요없다고 하였습니다.

1492년의 콜롬부스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로 80년전에 정화의 아프리카동부해안까지의 원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밖에서 필요한 물건이 없었기에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예산이 많이 소모되는

낭비적인 사업이라 중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지후에 배만드는 시설도 파괴시켰습니다.

 

서양처럼 국가가 아닌 상인들이 나섰으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중국은 풍족했기에 장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역이 쇠퇴했을 수도 있습니다.

 

향신료는 더운 지역에서 나는데 서양은 향신료 재배가 되지 않았습니다. 향신료는 금처럼 비샀습니다.

그러다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자 지중해무역로가 어려움을 겪자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려 했고

결국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가게 되어 향신료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향신료를 발견하고자 하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침략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대륙에서 금,은을 강제로 착취하고 포르투갈은 동양에서 무역을 하게되고

네덜란드, 영국이 무역에 뛰어들면서 상업이 발전하고 상인들이 부르조아계급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상업의 발전은 물건의 유통에서 생산에 관심을 갖게 하여 공업, 특히 대량생산의 필요성을 갖게 하여

산업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왜 중국이 아니고 영국에서, 조선의 15세기가 아닌 영국의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서양이 부족했기에 동양을 앞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서양은 분열되어있고 중국은 통일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통일은 좋고 분열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사상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통일시대보다는 춘추전국시대의 분열기입니다.

중국 사상은 춘추전국시대 학문의 각주입니다.

나라마다 분열되었기에 힘이 우선이었고 계급보다는 실력있는 자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경쟁해야하니 무기도 발달하였습니다.

또 권위가 무너졌기에 사상적으로 자유롭게 다양한 학문이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분열보다는 통일이 자연스러운 지역입니다.

통일이 자연스럽기에 황제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인 권위의식으로 유교외에는 자유롭게 학문이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유교도 공자와는 상관없는 왕권유지를 위한 타락한 유교였습니다.


서양이 교황아래서 정신적으로 통일된 중세시대에는 암흑시대였습니다.

이때는 권위적이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학문의 발전이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권위가 무너진 분열의 시대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자유로워지고 사상적으로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그리스사상이 각광을 받고 프랑스혁명의 기반이 된 계몽주의 사상도 생겨나게 됩니다.

 

또 분열돼 있었기에 전쟁이 많아졌습니다.

보통 전쟁이 날 때 외부의 침략세력이 있으면 다 무너지게 됩니다.

당시 외부세력은 오스만투르크였지만 유럽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원래 척박한 땅이었으니까요.

 

유럽은 전쟁이 많아져서 약해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해졌습니다.

30년전쟁때는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화약을 장전한 머스킷 병(현대의 소총)을 주무기로 하여 전쟁에서 기술혁신을 합니다.

이를 다른 나라들이 따라하기 시작하고요.

 

그후 유럽은 계속된 전쟁 때문에 발전한 총으로 말미암아 무력으로 동양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분열이 독이 아닌 약이 되었습니다.

 

중국이 분열보다 통일이 자연스러운 것은 지리적인 여건 때문입니다.

제가 중국여행을 할때 3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가도 산이 보이지 않고 평지였습니다.

아 이래서 중국이 분열보다는 통일된 적이 많은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반면 유럽은 중국보다 작아도 산이 많아 통일을 이루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중앙에 높은 고원이 있어 통일보다는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는 왜 서양과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저도 모르겠지만 신분억압인 카스트제도가 원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도는 분열되있을때 북쪽으로 뚫려있어 서양과는 달리 이슬람이나 아프칸족의 침입을 많이 받아서

분열이 독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셋째, 중국은 수직적인 권위적 사회고 유럽은 수평적인 분권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둘째 중국은 통일되었고 유럽은 분열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은 통일된 적이 많아 황제아래로 서열을 매길 수 밖에 없었기에 수직적으로 권위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래서는 지배계급의 교체는 가능하지만(한나라때는 호족, 남북조시대에는 문벌귀족, 송나라때는 사대부)

자유로운 사상이나 직업(상공업)은 발전하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유럽은 분열되었기에 사상이 자유로왔고 직업도 간섭을 덜 받았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중국과는 달리 간섭을 덜 받고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상공업이 발전하여 부르조아들이 새로운 힘을 가진 세력이 되어도 이들을 누르기보다는 서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